명랑 길벗 2006. 8. 13. 09:50

 

 

아! 루오

 

때로는 글(활자)이 싫다. 

때로는 담백한 채색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글보다는 그림이, 문(door)보다는 창문(window)이 우리의 비곤한 상상력을 넓혀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의 아픔이 설명할 수 없는 만큼 클 때 루오의 그림을 대하면 아픔은 삐에르 신부가 말한 것처럼 차라리 '선물'로 여겨진다.  현실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우릴 영원으로 인도한다.

 

생채기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마는 루오의 '미세레레'는 삶의 아픔을 노래한다. 

화가 루오가 보는 아픔은 그저 고통이고 상처가 아니라고 한다.

수묵화처럼 그려진 그 아픔이 단지 아름답다고 가르쳐준다.

 

숨은 그리스도

 

아래의 그림은 '숨은'(?) 그리스도의 그림이다.

그분은 늘 노동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입은 옷이 왜 청색일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백미는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그분의 눈길이다. 바로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분의 측은지심이다. 

 

루오의 이 그리스도화가 렘브란트의 '탕자'그림과 함께 엠마우스의 이콘이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두 그림은 엠마우스를 지탱하는 두 개의 버팀목이다.

 

엠마우스의 두 가지 버티목, 두 가지 이콘

 

렘브란트의' 탕자'가 본래의 나에게로, 그분에게로 가는 길이라면

루오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응시, 그분의 눈길이 되겠다.